허브 엘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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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브 엘리스는 1921년 텍사스주 파머스빌에서 태어난 미국의 재즈 기타리스트이다. 라디오를 통해 기타 음악을 접하고, 밴조와 하모니카를 연주하며 음악적 재능을 키웠다. 노스 텍사스 주립 대학교에서 더블 베이스를 전공했으며, 글렌 그레이와 카사 로마 오케스트라, 지미 도시 밴드 등에서 활동했다. 루 카터, 조니 프리고와 함께 소프트 윈즈를 결성하여 재즈 스탠다드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에 합류하여 명성을 얻었으며, 그레이트 기타스를 결성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90년대에는 아칸소 재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10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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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브 엘리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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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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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미첼 허버트 엘리스 |
출생일 | 1921년 8월 4일 |
사망일 | 2010년 3월 28일 |
출생지 | 텍사스주 파머스빌 |
사망지 |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국적 | 미국 |
직업 | 음악가 |
악기 | 기타 |
장르 | 재즈 스윙 쿨 재즈 웨스트 코스트 재즈 |
활동 기간 | 1941년 – 2010년 |
레이블 | 버브 콩코드 재즈 Justice |
관련 인물 | 오스카 피터슨 |
2. 생애
허브 엘리스는 1921년 텍사스주 파머스빌에서 태어나 농장에서 성장했다.[3][4] 어린 시절 라디오를 통해 기타 음악을 접하고, 조지 반스의 연주를 듣고 재즈 기타리스트의 꿈을 키웠다.[3][4] 노스 텍사스 주립 대학교 음악대학에서 더블 베이스를 전공했지만, 1941년 학비 문제로 중퇴했다.[4] 이후 캔자스 대학교 밴드와 함께 6개월 동안 투어를 했다.[4]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글렌 그레이와 카사 로마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고,[3][4] 지미 도시 밴드에서 첫 녹음 솔로를 연주했다.[3][4] 1947년까지 지미 도시 밴드에서 활동하며 루 카터, 존 프리고와 함께 소프트 윈즈를 결성, 냇 킹 콜 트리오 스타일의 연주를 선보였다.[4]
1953년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에 합류하여[3] 1958년까지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다. 당시 인종차별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트리오의 유일한 백인 멤버로 활동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는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투어를 진행했다.[3]
1960년대에는 할리우드 녹음 스튜디오에서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다가 1973년 재즈계에 복귀했다. 이후 바니 케셀, 찰리 버드, 탈 팔로우 등과 함께 그레이트 기타스를 결성하여 활동했다.[3]
1994년 아칸소 주 재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7] 1997년 노스 텍사스 주립 대학교 음악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7] 2010년 알츠하이머병으로 사망했다.[7]
2. 1. 초기 생애 (1921-1942)
허브 엘리스는 1921년 텍사스주 파머스빌에서 태어나[3] 농장에서 자랐다.[4] 라디오에서 라이트 크러스트 도우보이스를 들으며 처음으로 기타 음악을 접했다.[4] 세 살 때 하모니카를, 여섯 살 때 밴조를 연주했다.[4] 형이 기타를 가지고 있었지만, 조율을 잘못했다. 엘리스는 형보다 더 잘 연주하고 싶어서 기타를 제대로 조율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책을 샀고,[4] 거기서 기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4]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조지 반스의 연주를 듣고 재즈 기타를 연주하기로 결심했다.[3]노스 텍사스 주립 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할 때 이미 기타 실력이 뛰어났다.[3] 음악을 전공했지만, 대학에 기타 프로그램이 없어서 더블 베이스를 공부했다.[4] 대학을 중퇴하고 캔자스 대학교 밴드와 6개월 동안 투어를 했다.[4]
2. 2. 초기 경력 (1943-1952)
허브 엘리스는 1921년 텍사스주 파머스빌에서 태어나 농장에서 자랐다.[3][4] 라디오에서 라이트 크러스트 도우보이스를 들으며 처음 기타 음악을 접했고,[4] 세 살 때 하모니카, 여섯 살 때 밴조를 연주했다.[4] 형의 기타를 더 잘 연주하고 싶어서 기타를 제대로 조율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책을 샀고, 이를 통해 기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4]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조지 반스의 연주를 듣고 재즈 기타를 연주하기로 결심했다.[3]엘리스는 노스 텍사스 주립 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할 당시 이미 뛰어난 기타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3] 음악을 전공했지만, 대학교에 기타 프로그램이 없어 더블 베이스를 공부했다.[4] 대학교를 중퇴하고 캔자스 대학교 밴드와 6개월 동안 투어를 했다.[4] 1943년부터 1945년까지 글렌 그레이와 카사 로마 오케스트라에 합류했다.[3][4] 글렌 그레이 밴드 이후, 엘리스는 지미 도시 밴드에 합류하여 첫 번째 녹음 솔로를 연주했다.[3][4]
1947년까지 지미 도시에 머물면서, 광범위하게 여행하고 녹음했으며, 댄스홀과 영화관에서 연주했다. 루 카터는 1996년 인터뷰에서 "지미 도시 밴드는 6주간의 공백이 있었어요. 우리 셋은 빅 밴드와 함께 연주한 적이 있었죠. 존 프리고는 이미 밴드를 떠났는데, 버팔로의 피터 스튜이베산트 호텔 주인을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그곳에 가서 6개월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프트 윈즈라는 그룹이 탄생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엘리스는 존 프리고, 루 카터와 함께 재즈 스탠더드 곡인 "Detour Ahead"와 "I Told Ya I Love Ya, Now Get Out"을 작곡했다.[5][4]
소프트 윈즈 그룹은 냇 킹 콜 트리오를 본떠 만들어졌으며, 1952년까지 함께 활동했다.
2. 3.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와 전성기 (1953-1962)
엘리스는 1953년에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에 (바니 케셀을 대신하여)[3] 합류했으며, 스콧 야노는 훗날 이 트리오를 "재즈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피아노, 기타, 베이스 트리오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1953년부터 1958년까지 피아니스트 피터슨, 베이시스트 레이 브라운과 함께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에서 활동하면서 유명해졌다.[3] 그는 당시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시대에 그룹의 유일한 백인이었기 때문에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는 멤버였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로서의 라이브 및 녹음 작업 외에도, 이 유닛은 일반적으로 드러머를 추가하여 노먼 그란츠의 Verve Records의 "하우스 리듬 섹션" 역할을 했으며, 벤 웹스터, 스탠 게츠와 같은 테너 연주자, 디지 길레스피, 로이 엘드리지, 스위츠 에디슨 및 기타 재즈 거장들을 지원했다. 엘리스는 리듬 섹션의 일부였지만, 모든 트랙에서 솔로를 연주하지는 않았다. 드러머 버디 리치와 함께, 그들은 엘라 피츠제럴드와 루이 암스트롱의 듀엣 앨범 "컴백" 앨범의 백킹 밴드이기도 했다.
이 트리오는 그란츠의 재즈 앳 더 필하모닉 콘서트의 주역 중 하나였으며, 미국과 유럽을 거의 끊임없이 순회하며 재즈계를 휩쓸었다. 엘리스는 1958년 11월 피터슨 트리오를 떠났고, 기타리스트가 아닌 드러머 에드 시그펜이 그를 대신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엘리스는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투어를 했다.[3]
이 세 사람은 존 허블리의 1958년 만화 ''The Tender Game''에 대한 재즈 즉흥 연주 배경으로 "Tenderly"를 연주했다.[6]
2. 4. 스튜디오 뮤지션 및 재즈 복귀 (1960년대-1973)
허브 엘리스는 1960년대에 주로 스튜디오 뮤지션으로 활동했다. 그는 할리우드 녹음 스튜디오에서 다양한 세션에 참여하며 주축 멤버로 활약했다.[3] 결국 그는 무대와 레코드 모두에서 재즈 경력에 집중하기 위해 스튜디오 작업을 그만두었고, 1973년에 재즈계로 복귀했다.2. 5. 그레이트 기타스 (1970년대-2000년대)
바니 케셀, 찰리 버드, 그리고 나중에는 탈 팔로우와 함께 그레이트 기타스라는 앙상블을 결성했다.[3]2. 6. 후기 활동 및 사망 (1990년대-2010)
1994년, 허브 엘리스는 아칸소 재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7] 1997년 11월 15일에는 노스 텍사스 주립 대학교 음악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7]엘리스는 만화가이자 ''The Far Side''의 제작자인 개리 라슨에게 기타 레슨을 해주고, 그 대가로 엘리스와 베이시스트 레드 미첼의 앨범 ''Doggin' Around''(Concord, 1988)의 커버 삽화를 받았다.
엘리스는 2010년 3월 28일 아침,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알츠하이머병으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
3. 평가 및 영향
허브 엘리스는 뛰어난 기타 실력으로 노스 텍사스 주립 대학교 음악대학에 입학했으며, 비록 기타 프로그램이 없어 더블 베이스를 공부했지만 그의 재능은 빛을 발했다.[3][4] 글렌 그레이와 카사 로마 오케스트라, 지미 도시 밴드에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고,[3][4] 존 프리고, 루 카터와 함께 결성한 소프트 윈즈는 냇 킹 콜 트리오를 본떠 만든 그룹으로, "Detour Ahead"와 같은 재즈 스탠다드 곡을 작곡하며 이름을 알렸다.[5][4]
1953년, 엘리스는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에 합류하여 (바니 케셀을 대신하여),[3] 스콧 야노가 "재즈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피아노, 기타, 베이스 트리오 중 하나"라고 칭송할 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3년부터 1958년까지 피터슨, 레이 브라운과 함께 트리오 활동을 하며 명성을 얻었으며,[3] 당시 인종차별 시대에 유일한 백인 멤버로서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오스카 피터슨 트리오는 노먼 그란츠의 Verve Records에서 "하우스 리듬 섹션" 역할을 하며 벤 웹스터, 스탠 게츠, 디지 길레스피, 로이 엘드리지, 스위츠 에디슨 등 재즈 거장들을 지원했다. 엘리스는 리듬 섹션의 일원이었지만 모든 트랙에서 솔로를 연주하지는 않았다. 버디 리치와 함께 엘라 피츠제럴드와 루이 암스트롱의 듀엣 앨범 "컴백" 앨범의 백킹 밴드로도 활동했다.
그란츠의 재즈 앳 더 필하모닉 콘서트의 주역으로 미국과 유럽을 순회하며 재즈계를 휩쓸었던 엘리스는 1958년 트리오를 떠났고,[3] 이후 엘라 피츠제럴드와 함께 투어를 하기도 했다.[3] 그는 바니 케셀, 찰리 버드, 탈 팔로우와 함께 그레이트 기타스를 결성하여 활동했다.[3]
1994년 아칸소 재즈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97년 노스 텍사스 주립 대학교 음악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는 등 그의 업적은 널리 인정받았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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